• 2023. 7. 12.

    by. 건물주님이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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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오영수의 생애

      오영수는 1914년 2월 11일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언양이란 조그마한 산중고읍에서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몸은 비록 허약했으나 그는 고향의 아름다운 전원 속에서 그 특유의 정서와 심성을 기르며,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이런 유년기의 체험 및 환경이 작품 속에서 서정적인 그리움과 추억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마을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봄이면 뻐꾸기 울음과 함께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고 가을이면 단풍과 감이 풍성하게 익는, 물 맑고 바람 시원한 산간 마을이었다.
      먼 산골짜기에 얼룩얼룩 눈이 녹기 시작하고, 흙바람이 불어오면 양지 쪽에 몰려 앉아 볕을 쬐던 마을 아이들은 들로 뛰쳐나가 불놀이를 시작했다.
    <요람기>

     

      유년의 체험을 오영수만큼 문학작품 속에서 재현한 작가도 흔치 않은데, 이는 오영수 문학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1928년에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빈궁한 가정 형편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모교의 추천으로 우편국 사무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열악한 집안 사정으로 열정적인 학구열을 이룰 수 없어 고민과 좌절에 빠져있던 그에게 자연과 문학은 큰 힘이 되었다.

      1931년 오영수의 학구열을 성취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던 우체국장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독학으로 야간 중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실내 장식사의 수습생으로 다니면서 일본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각기병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야 했다. 그러나 실내 장식사에게 배운 솜씨를 발휘하여 도장과 간판일을 하면서 빚도 갚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술원에 입학하여 배운 것은 미술이었다. 오영수는 화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어 만돌린을 탔다고 한다.

     

      내가 소설을 공부하게 된 데도 많은 곡절이 있다. 그림을 하려다 못했고, 음악을 하려다 못했다. "화쟁이가 될려면 부자의 의를 끊겠다!" 이래서 그림을 못했고, "풍각쟁이가 될려거든 오늘부터 이 집을 나가라!"이래서 음악도 못했다. 이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주로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물질적으로 남다른 고난과 가정환경의 무자비한 제압 속에서 오직 독서만이 젊은 낭만을 달래 주었다. 단순히 독서 취미가 어느새 문학으로 끌려간 모양이다. 동요, 동시를 썼고, 서정시 나부랭이도 써봤다.
    <나의 소설공부>

     

      1945년 동래 일광에는 김동리의 백 씨였던 김범수가 피신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오영수는 김동리를 두어 번 만나 문학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 그의 문학적 영향을 서서히 받게 된다.

      그 후 부산 경남 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과, 국어과를 맡아 교직생활을 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그가 문단에 데뷔하게 된 것은 1949년 9월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가 발표되면서이다. 그의 등단은 일반작가들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다. 오영수가 문단에 데뷔하기까지의 준비기인 청년기는 비록 어렵고 궁핍했던 시적이었으나 이 시기에 전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가 차츰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고 작품에 폭넓게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오영수는 유치환과 함께 종군기자로 전쟁에 참가하여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동부전선> <내일의 삽화> <피> <새> <후일담> 등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내놓게 된다.

     

      장전 들어가는 길가 개굴창에 적의 시체 하나가 빳빳이 누웠다. 신발은 누가 벗겨갔는지 맨발이고 웃옷으로 덮은 얼굴을 들어보니 머리가 초가집 채양같이 이마를 가리고 길숨한 얼굴이 종잇장같이 희다. 상처는 잘 모르겠고 시간은 그리 오래된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쥐고 가던 들국화 다발을 시체 위에다 던져 버렸다.
    <동부전선>

     

      종군에서의 이러한 체험은 그의 소설에서 '인간의 신성에 대한 확신'을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원산을 마지막으로 종군을 끝낸 오영수는 1.4 후퇴로 인해 부산으로 돌아와 복직을 하게 된다. 서울 수복 후 당시 김기오 씨가 운영하던 대한 교과서 주식회사의 후원으로 조연현, 임상돈, 김구룡, 박재삼 등과 함께 순문예지인 <<현대문학>>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그의 도시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서울 생활에 만족 못하고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까닭에 그의 후기 문학의 특성인 귀향 의식과 이상향의 추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나왔다.

      그는 1954년 동심의 세계와 서정성이 두드러진 제1창작집 <<머루>>를 발간하였으며 1955년에는 토속적인 성격이 강한 제2창작집 <<갯마을>>을 내놓아 제1회 한국문협상을 받았다. 1958년에는 사실적이고 해학적 경향의 제3창작집 <<명암>>을 내놓았으며 1959년에는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에는 원시적 경향의 제4창작집 <<메아리>>를 1965년에는 전통사회에 대한 그리움이 보이는 제5창작집 <<수련>>을 내놓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2월 위궤양이 악화되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재수술을 받게 된다. 이때 직접 체험한 절박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죽음의 의식문제를 <입원기>에서 다루고 있다. 재수술로 인해 오랜 직장인 '현대문학사'를 떠나는데 이때 오영수는 외로움과 소외감, 허탈감 등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상향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변모되기 시작한다.

      오영수 후기 소설의 공통적 특질은 인간과 자연의 융화로, 인간의 정신이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이란 자연의 품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연에 바탕을 둔 이상향을 찾는 것이라고 보았다.

      1976년 제6창작집 <<황혼>>이 출간되었으며, 병고와 노년기에 느끼는 소외감, 고독감에 시달리다 1979년 3월 경남 울주군 농촌면 곡천리로 낙향하였다.

     

      1977년 3월 15일 -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도 내게는 과분해서 팔아 버리고 조그마한 반양옥으로 줄여 그새 약값이며 입원비며 정리를 하면서 꿈에도 잊어보지 못한 환양을 결심했다. 서울에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시골에서 쓰는 글과 서울에서 쓰는 글이 또 다를 까닭이 없겠다. 시멘트와 베니아의 문화, 십 년이 가깝도록 한 담새 살아오면서도 그 집 식구가 몇이며 뭣을 하는 사람들인지 조차 모르는 즉 이웃이란 완전히 잃어버린, 즉 인간 상실의 도시생활에는 더 견디지 못해 나로서는 좀 위험하고 무사려하고 저돌적이고 대담한 혁명을 단행한 셈이었다. 서울서의 30년, 그새 나는 옆눈 한 번 팔지 못했다. 처자식들이 굶고, 떨고, 더운 데만 전신경을 기울여 왔다.
    <낙향산고>

     

      도시에서 기계문명의 피해 의식과 자연에 대한 희구로 가득 차, 마침내 자연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문명 생활을 원하여 도시로 찾아갔다가 결국 문명의 피해자가 되어 전원으로 귀화하고만 것이다.

      그는 낙향한 이후에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쉬지 않고 창작을 했는데 각 지방 사람들의 특성을 논한 <특질고> 파동으로 절필하고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그는 1979년 5월 15일 생애를 끝마쳤다.  

     

     

    ※ 참고 문헌

    한은희 / 오영수 소설 연구 /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 1997

    서광숙 / 오영수 소설 연구 / 영남대학교 / 2002

    김지영 / 오영수 소설 연구 / 강릉대학교 교육대학원 / 1998

    송준호 / 오영수의 갯마을 연구 / 한국언어문학 / 2002

    권영민 / 한국현대문학사 2 / 민음사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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