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7. 14.

    by. 건물주님이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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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희는 1942년 8월 20일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양장본으로 된 세계 문학전집이 있었다. 조세희는 이 책들을 탐독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온 조세희는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문예 창작과에 들어가, 다니다가 경희대 국문과에 다시 들어갔다. 조세희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스물세 살이었던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돛대없는 장선>이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조세희의 작가로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조세희의 <돛대없는 장선>이 당선되던 해, 그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69년 결혼과 동시에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또 좋은 작품을 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70년 학생들 수험서인 <진학>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조세희는 이런 이유들로 인해 문학에서 멀어져 갔다. 

      직장생활을 하던 조세희가 문학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3년 무렵이었다. 한 작가로서, 아니 한 시민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조세희는 74년 10년간 놓았던 펜을 다시 잡았다. 그가 경험한 빈곤층의 핍박받는 생활이 그를 다시 문학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내가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철거반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 나는 그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이렇게 다시 문학을 시작했다. 출판사에 다니며 틈틈이 다방에서 글을 쓰던 그는, 1976년 <학생중앙>으로 직장을 옮긴 후에는 근처에 있던 서소문 공원에서 소설을 써나갔다. 틈틈이 나는 시간에 쓰는 소설이라 조세희는 항상 시간에 쫓겨야 했고 회사의 눈치를 봐야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문체는 점점 단문이 되어 갔다. <난쏘공>의 스타카토식 딱딱 끊어지는 문체는 모두 조세희의 소설 창작 여건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당국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해야 했다. 자신이 일궈낸 창작물이 온전히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난쏘공>을 동화처럼, 현실과는 한발 떨어진 꿈처럼 써나갔다. 즉, 사실을 그리되 그 형식과 문체에서 동화적인 냄새를 풍긴 것이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일반인들과는 달리 사회의 약자로 취급받는 난쟁이, 꼽추 등을 등장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난쏘공>에 실린 연작 소설들은 1975년 여러 잡지에 소개되다가 76년부터는 계간 <문학과 지성>에 수록되었다. 수록 초기부터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받은 이 소설들은 78년 6월 10일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이 작품들은 76년 6개월 동안 8만 4천 부를 찍어내는 놀라운 판매 기록을 올렸다. 판매는 계속 지속되었다. 첫해만큼은 아니었지만 <<난쏘공>>은 1980~1990년대까지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조세희는 <난쏘공> 이후 침묵하다 1983년 <<시간여행>>을 내놓는다. 그리고 85년에는 79년 사북사태때 찍은 사진 등으로 사진 산문집인 <<침묵의 뿌리>>를 내놓았다. 그가 사진기를 산 것은 1979년 사북사태 때다. 당시 그곳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사북에 가서 그것들을 찍으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조세희는 자신이 직접 사진기를 하나 사 들고 그곳의 탄광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었다. 단지 기록 때문이었다. 그 기록의 산물이 <<침묵의 뿌리>>이다.

      조세희는 앞의 두 창작물 이외에는 80년대에는 침묵했다. 박정희 군부독재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듯한 1980년 전두환에 의해 피로 물들어진 80년 광주의 영향이 깊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한번 무산된 희망 때문이었다. 이것은 조세희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고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란 고민에 빠져 그는 80년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1991년 자신의 첫 장편 소설인 <<하얀 저고리>> 집필을 끝마쳤다. 조세희는 80년 광주의 아픈 상처를 그린 이 작품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키득키득 거리면서 80년대를 보냈다. 잘못되면 침묵보다 못한 말로 너스레를 떨기 싫었다. 침묵은 내 방식대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행위였다. 그러나 나는 잠자지 않았고 침묵 속에서 치열했다고 자부한다. 이 작품은 침묵 속에서 내가 준비했던 말들의 일부다.

     

      1997년 가을, 조세희는 계간지 <<당대 비평>>을 창간했다. 평상시 느꼈던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에 95년 프랑스 노동자 총 파업과 96년 한국의 노동자 대투쟁을 겪고 느낀, 프랑스와 한국 사회의 격차는 <당대 비평>을 창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는 이들이 저더러 그래요. '조형 왜 그렇게 힘들게 합니까, 세상이 바뀌었는데 얼굴 좀 피고 즐기면서 사세요' 그 사람들 머리에선 70, 80년대가 벌써 화석이 돼 있어요. 그게 지금도 이어지는 형편인데, 벌써 역사를 만들어 버리면 어쩝니까. 군부 독재가 이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미 IMF 체제는 시작된 거였어요. 박정희가 한 일이 뭡니까. 외국 자본에 땅 주고 삐쩍 마른 노동자 대준 것뿐이잖아요. 그 노동자들마저 지금은 거리로 쫓겨났고요. 우린 여전히 제 3세계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겁니다. 옛것은 여전한데 새것은 자라지 않았어요. 

     

      변하지 않았지만 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70~80년대를 역사로 인식하는 사람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 아직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스물 몇 살 짜리가 쓴 문학에서 배울거 하나도 없다. 오래 준비하지 못한 것들은 단숨에 끝난다. 뼈있게 성질을 가지고 코피를 쏟아가며 쓴 책만 읽어라. 

     

      학생들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수줍음이 많지만 강의내용은 거침없고 신랄하다. 조세희 그가 99년 1학기부터 경희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로 임용돼 매주 목요일 대학원생들에게 '한국현대문학사상사'를 강의했다.

     

        나는 하찮은 존재지만 한가지만은 긍지를 갖고 살아왔어요. '문학하는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단독 정부의 수반이다' 라는 것. 대체 여러분이 배우려는 문학사상이라는게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갖는 생각 하나하나가 문학사상이며 그게 모여 문학사가 되는 겁니다.

     

      그가 문학에 관한 발언을 하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난쏘공> (78년) 이후 작품집 <시간여행> (83년)과 시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 (85년)가 있을 뿐. 80년 광주문제를 다룬 장편 <하얀 저고리>는 91년 계간지 연재 후 9년째 미완으로 남겨두고 있는 그다. 문장이 마땅치 않아서다. 80년대는 그렇게 치열하고 참혹했는데 그걸 전달하는 문장은 왜 이리 정확지 못 한가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조세희 그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인터뷰는 물론 기고도 하지 않는다. '한 말발'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논하고 정의를 외칠 때, 그는 쉽게 혀를 놀릴 수 없었다. 침묵은 희망이 사라진 시대를 책임지는 그 나름의 의식이었다. 그는 월간 <삶이 보이는 창>이 마련한 르포문학 강좌에서 강의를 한다. 노동문학운동 하는 후배들이 강권해 만든 자리라 한다. 그는 노동자와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전방위적 공세에 고통스러워하는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를 매일 같이 듣는다고 했다.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해 총파업에 나서야만 하는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오늘이 그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근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자주 접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가 글을 발표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대표작가에 그의 이름이 오르고 있고, 그의 작품은 우리 곁에 있었다. 또한 그의 실제 몸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반전평화운동 조직에 참여했고, 때마다 진보정당 지지선언을 했으며, 무엇보다 각종 집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노동자 집회엔 거의 빠지지 않는다. 몸이 아파도 사진기를 둘러매고 집을 나선다. 그 사진기로 노동자들의 숨결을 느끼고, 호흡한다.

     

      가끔 집회장엘 가서 사진을 찍어. 사진을 찍으려면 현장에 있어야 돼. 현장에 못 가고선 찍을 수 없지. 내가 카메라를 들고 어딜 간다는 것은 현장 깊숙이 들어가는 거야. 글을 쓰는 사람은 집에서 써도 돼. 하지만 사진은 아니지. 현장에서 현장을 호흡해야 돼. 사진기를 대고 있으면 노동자들 숨소리가 다 들려. 내가 글도 못 내놓고 있는데, 노동자 친구들 외로움 탈 수 있으니까 내가 가서 외로움의 분량이 줄어들 수 있다면 하고 바라면서 가는 거야.

     

      조세희에게 노동자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작품 활동' 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구호나 투쟁 몸짓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어도 어떤 연대의 시간을 가질 때 그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작품을 못 써도 그 안에 여러 편의 작품이 들어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는 안타까워했다. 돈도 먹을 것도 없어 아이들 옷에 주머니를 달아주지 않았던 엄마, 고기 사 먹을 돈이 없어 엄마 몰래 옆집 고기 굽는 냄새 맡으러 가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파, 117센티미터의 키에 32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지닌 난쟁이 아빠 때문이다. 자기 말에 책임지지 않는 시대에, 언어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잡고 쉽게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였지만, 오늘의 난쟁이들의 고통을 마음껏 써 주지 못하는 처지를 그는 마음 아파했다. 

     

      사람은 생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누구나 한 번은 절규한다고 해. 난 그 말을 믿어. 어느 역사에든 빛나는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을 찾아봐. 거기엔 절규하는 사람이 있어. 그 순간의 역사가 빛나는 건, 그 사람의 절규가 너무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서 후대 사람들이 버리지 않고 잘 모아 놓았기 때문이야

     

     

     

    ※ 참고 문헌

    한국현대문학사 / 민음사/ 권영민 / 1993

    조세희 소설의 서사기법 연구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김지영 / 2003

    조세희 소설 연구 /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이재은 / 200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동아출판사 / 조세희 / 1995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문학과 지성사 / 조세희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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