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5. 20.

    by. 건물주님이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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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황토골에는 상룡, 쌍룡, 절맥설의 전설이 서려 있다. 용이 피를 흘려 흙을 붉게 적셨기 때문에 황토골이라고도 하고, 산의 맥을 지르니 붉은 피가 흘러내려 황토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용냇가의 두레패와 떨어져 혼자 논을 매고 있던 억쇠는 분이를 기다리고, 술 동이를 이고 온 분이는 설희와 득보를 한칼에 찔러 죽이겠다고 악을 쓰다 풀 위에서 잠을 잔다. 억쇠는 장정들도 겨우 든다는 들돌을 열세 살에 들어 올린 장사이다. 그런데 황토골에는 '장사가 나면 부모에게 불효하고 나락에 역적이 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억쇠는 백부의 근심스러운 말을 듣게 되고, 본인도 집안의 안전을 위해 힘쓰기를 삼가며 자해하기도 한다. 허무감에 젖어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득보를 만난다. 그리고는 냇가에 오두막 한 채를 마련해 준다.

      득보는 이복형제를 죽이고 서울로 달아났다가, 어느 대갓집 부인과의 관계가 탄로 나서 황토골에까지 떠돌아 들어오게 되었다. 득보와 억쇠는 서로 힘이 센 만큼 금방 가까워졌고, 그들은 이유 없이 붙어서 싸움질만 하게 된다. 

      득보와 분이 사이에는 아이까지 하나 두었는데, 득보는 분이를 억쇠에게 주며 데리고 살라고 한다. 그러나 분이 마음은 항상 득보에게 있었고, 분이는 억쇠와 득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생활하는데, 득보가 여자를 얻어 오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쫓아내곤 한다.

      그러던 중 억쇠는 늙은 어머니와 한 점 혈육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용모와 행실이 바른 설희라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게 된다. 설희는 득보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자였다. 득보마저 설희에게 마음이 쏠리자 분이는 억쇠의 늙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애를 밴 설희를 죽이고, 자고 있던 득보마저 칼로 찌르고 사라진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득보는 깨어나 분이를 기다리다가, 그녀를 찾아 마을을 떠난다. 분이를 찾아 나선 득보가 분이 대신 딸을 데려 온다. 억쇠는 득보가 사라질까 봐 노심 초사한다. 억쇠와 득보는 마지막 대결을 위해서 용냇가로 내려간다.

     

    등장인물

    • 억쇠 : 황토골 태생의 힘센 장사. 황토골 전설의 '용'에 해당
    • 득보 : 황토골에서 팔십 리 가량 떨어진 동해변 태생으로 힘이 센 장사. 또 다른 '용'에 해당
    • 분이 : 색주가 출신으로 억쇠와 득보 사이의 갈등의 원인 제공
    • 설희 : 스물셋에 홀로 된 과수댁으로 억쇠에게 개가하게 되나, 끝내는 분이에게 죽임을 당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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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 배경 : 황토골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상 특징 : 한국적, 샤머니즘적, 신비주의적 소재 사용
    • 주제 : 운명론적 삶의 허무주의, 두 장사의 아무 보람도 없는 자학적인 싸움을 통하여 삶의 허무주의적 단면을 드러냄
    • 출전 : <문장 제4호> (1939)에 발표

     

    이해와 감상

      <황토기>는 해방 후 단편집에 수록되는 과정에서 역시 대폭적인 개작을 겪게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경우 개작은 황톳골에 관련된 전설을 제시하는 방식에서부터 분이의 실종과 죽음에 관한 대화의 새로운 도입에 이르기까지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작품 자체를 보다 세련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으나, <산화>와 <무녀도>의 개작처럼 주제 자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개작이 이루어지기 전이든 그 후이든 관계없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황톳골에 얽힌 전설과 억쇠, 득보의 삶이 그대로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억쇠와 득보는 황톳골의 지세에 얽힌 용의 전설을 자신의 삶으로 산다. 전설이 말해 주는 황톳골의 형성원리를 그대로 자기 삶의 형성원리로 삼는 것이다. 이는 실로 기이하고도 인상적인 자연과 인생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풍수사상을 떠올릴 수 있다. 풍수사상의 구체적인 면모가 그대로 <황토기>의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자연의 형성원리와 인생의 형성원리를 하나로 이어 놓은 <황토기>의 세계에서 그것과 서로 통하는 면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동리의 전통지향적 보수주의가 이룩한 동양 전통사상과의 도 한 가지 흥미로운 만남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배적인 정조를 이루는 것은 <무녀도>나 <바위>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여기에는 주인공이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좌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비극적 분위기가 있다. 이러한 비극적 색채는 황톳골에 관한 세 가지 전설 가운데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추든 다 같이 느껴지는 것이지만 특히 절맥설의 경우에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부됨으로 해서 구체적인 역사적 근거까지도 획득하게 된다.

      이 작품을 비극과 관련시켜 생각하면서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주인공 억쇠의 생애를 한마디로 좌절의 삶이라고 할 때 그것은 비단 그 자신의 힘이 헛되이 소모되고 말았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과 동시에 우리는 그가 가족주의를 신봉하는 전통적 한국인답게 자식을 보아 대를 잇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아이를 밴 이설(개작본에서는 설희)이 분이에게 살해당함으로써 그러한 그의 소망은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억쇠가 지닌 놀라운 생명력은 끝내 정상적인 가족의 형성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마는 셈인데, 이처럼 생명력이 가족의 형성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 비극성이 깃든다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황토기>가 전통적인 한국 정신의 맥을 잇고 있음을 증거 하는 또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발표된 <무녀도>나 <바위>가 서구적인 비극과는 거리를 가지는 것이었듯이, <황토기>도 서양의 비극과는 상당히 떨어진 자리에 위치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 나오는 억쇠는 <무녀도>의 모화나 <바위>의 술이 어머니만한 도전이나 저항의 자세조차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황톳골의 전설이 가리키는 자신의 운명에 충실히 순응하며 살다 죽는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운명에 순응하며 자연과 일체를 이룬 자로서의 평화와 위안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억쇠는 분명 전통적인 한국 정신의 계보 위에 서 있는 존재이며, 서양 비극의 일반적인 주인공들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참고

    1. 설화와 소설의 유기성을 보여주는 작품 : 우리의 구전적인 설화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절맥의 모티프 또는 상룡의 모티프 등 지역창조의 연기설화를 전경으로 한가운데, 이와 병렬하여 중심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작품 서두에 제시되는 설화는 '추락, 저주, 거세'라는 이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를 암시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구원과 희생이 아닌 저주받은 피의 상속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 상징성 : 첫 번째 '상룡설'은 황룡 한 쌍이 승천사에 바윗돌을 맞아 출혈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황토골 장사인 억쇠의 비극적 좌절을 암시한다(추락). 두 번째 '쌍룡설'은 황룡 한 쌍이 승천 전야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아' 여의주를 잃게 된다는 것인데, 억쇠의 생애에서 축적된 정력이 득보와의 무모한 싸움에서 소비된다는 것이다(거세). 세 번째 '절맥설'은 장사가 날 곳에서 이미 당나라의 장수가 와서 혈을 질렀으니 독수리가 날개를 찢기 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억쇠가 단순한 불세출의 장사로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저주). 치솟는 힘을 바르게 써보지 못하고 있는 억쇠의 삶과 유랑의 삶을 사는 득보의 편력, 그들이 벌이는 무모한 힘겨룸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전설적인 만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서두에서 밝힌 절맥설의 틀과 연관 지어 볼 때, 한국인이 지닌 운명론적 비극성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식민지 시대 한국민의 비극적 상황을 암시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억쇠와 득보의 허무한 격투, 치솟는 힘을 바르게 써 보지 못하는 억쇠의 아픔은 쌍룡설 및 절맥설과 연관되면서 한국인이 지닌 운명론적 비극성을 강렬한 허무주의로 채색하고 있다.
    3. 운명의 절대성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모습 : 김동리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억쇠와 득보는 피 흘리며 죽어간 용들과 같이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 것이다. 억쇠는 이러한 운명을 벗어나려는 노력 없이 그 절대성에 복종하여 결국엔 고통을 감수하면서 평생을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운명은 나의 의지 없이 받아야 하는 것이며,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자기의 몫인 것이다. 작가 김동리는 "운명은 완성할 예술이며 슬기로운 벗"이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운명관이 이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억쇠는 '나라에서 안다'는 황토골 장사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불세출의 장사로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힘을 쓸 날을 기다리며 헛되이 청장년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가슴에 불을 간직한 억쇠에게는 허무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허무한 것은 억쇠의 허무 의식과 이에 따른 자포자기적인 정력 처리 방식이다. 사실 억쇠와 득보의 기묘한 우정(?)의 성립도 득보가 기운이 엄청나게 세다는 데서 비롯한다. 그것은 억쇠가 막연하나마 운명의 공감대를 느낀 것, 또 자기의 정력 처리의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상봉에서 억쇠는 '문득 자기의 몸이 공중으로 스스로 떠오르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며 그(득보)의 멱살을 놓았던 것이다. 천변에서의 무승부 격투는 외관상 치정적 양상을 띠고 있지만, 억쇠에게는 좀 더 근본적인 것으로 일종의 자포자기적 정력 처리였다. 격투에서 짐짓 수세를 취하면서 자기의 전 체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도 그것이 허무감에서 빚어진 태도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격투 중 주먹세례를 연거푸 받으면서도 그저 흥소를 터뜨리는 것도 자기가 비장해 왔던 힘의 무상성, 그리고 득보를 겨우 적수로 삼고 있다는 허무감이 주는 허탈 의식, 그리고 득보 같은 위인은 도저히 자기의 참다운 적수일 수가 없다는 공허감에서 터져 나온 흥소였던 것이다. 득보가 척상을 입었을 때 억쇠가 '죽든 않겠나, 죽든......'하고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도 득보를 잃음으로써 이러한 허무주의적 감정을 제공하는 자를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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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문헌
    김동리 / 이동하 / 건국대학교 출판부 / 1996
    김동리 / 이태동 / 벽호 / 1993
    김동리 / 유기룡 / 살림 / 1996
    김동리 삶과 문학 / 김정숙 / 집문당 / 1996
    김동리 소설 연구 / 조회경 / 국학자료원 / 1999
    김동리 소설 연구 / 이진우 / 푸른사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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