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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세계의 관념적 주체
서정인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는 실존주의적 색채가 두드러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의 처녀작 <후송> (1962)을 비롯해 1960년대 후반에 발표된 <물결이 높던 날> (1968), <미로> (1968), 1970년대에 <금산사 가는 길> (1974) 등의 작품에서 존재의 근원에 관한 물음이나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 그리고 주체의 실존의지 등이 포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초기 작품에서는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한 한 개인의 체험 상황과 그 의식의 상태가 매우 중요한 테마였다. 1950년대 전후 문학에 팽배해 있던 실존주의적 경향이 196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정인의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는 전쟁으로 인한 윤리적 황폐와 경제적 빈곤 등의 부정적 양상에 시달리며 죽음이라는 문제에 전면적으로 부딪힌 시대였다. 만연한 죽음의 영향 속에서 1950년대는 허무주의와 비극적 감성이 짙어졌고 이것은 전후 문학의 특징이 되었다. 존재와 자각과 성함을 우선한다는 것에서 1950년대 전후 문학의 실존주의적 경향과 196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정인의 초기 작품에는 분명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쟁의 충격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즉물적이고 체험적일 수밖에 없는 1950년대의 전후 문학적 풍토에서 다소 시간적 거리를 확보한 서정인의 초기 작품에는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관념에의 몰임을 소설적 장치로 개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이것이 1950년대 전후문학의 실존주의적 경향과 서정인의 초기 소설이 변별되는 부분이다.
서정인의 초기 작품에서는 전쟁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세계를 비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세를 보인다. 자의식에 몰입한 인물들은 세계를 왜곡되게 인식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들의 발화는 결과적으로 의도적 단절로 나타나며 타자와의 대화도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고독한 내면과 탐색적 인물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왜곡된 세계에서 자의식을 사변적으로 인식하는 관념적 주체들이다. 전쟁의 경험은 서정인의 작품에서 현실의 극명한 조망보다는 고독한 내면으로 침잠해 가며 현실에 대한 막연한 탐색을 시도하는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인물에게 주어진 현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물들은 자신의 내면적 의식 안에서 방황하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후송>은 티나이투스라는 증상을 앓고 있는 성 중위의 후송 과정을 통해 군대라는 조직에서 개인이 겪는 단절감과 고독한 내면 의식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군인으로서, 하나의 주체로서의 실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성 중위의 심리 상태는 작품에 흩어져서 나타난다. 성 중위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현실에 대한 불안과 초조의 근원이 인과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주체의 실존적 탐색 과정과 맞물려 작품 전반에 걸쳐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성 중위는 실존 자체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실존적 탐색이란 한정된 범위와 시간 안에서 단계적이면서 순차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탐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그 밖의 심리적 징후는 작품의 어느 특정 부분에 집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심리적 이상의 근원조차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전체적으로 모호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성 중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둠에서 느끼고 죽을 것 같은 강박 관념에 잠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편집증적 노이로제에도 시달린다. 게다가 성 중위는 자신이 후송과정에서 읽고 있던 책에 등장하는 앨이라는 인물조차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가 모두 죽음에 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밤이 되어 어둠이 드러날 때 일반적으로 그것은 시간의 변화로 인식된다. 그러나 성 중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적 지표로써 어둠을 인식한다. 그것은 실존 자체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이며 따라서 성 중위에게 어둠은 실존 자체를 엄습하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성 중위는 의무 참무에게 불면의 고통을 호소한다. 관습화된 성 중위의 불안은 심지어 독서에서도 이어져 죽음을 상기한다. 성 중위의 이러한 정신적 불안은 육체적 증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귀에서 소리가 나는 이명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 중위가 중동부 전선에서 구경 45 권총으로 빈 깡통을 향해 150발을 난사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별다른 동기 없이 그저 내용물이 들어 있지 않은 빈 깡통, 즉 용도 폐기된 깡통을 난사함으로써 성 중위는 쾌감을 얻고 자기 본연의 잠재된 폭력성과 공격성을 발견한다. 이때 귀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성 중위 내면의 일탈로부터 오는 증상이므로 일반적인 임상적 진단과 처방으로써는 치유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피적 현상만으로 진단을 내리고 육체적, 정신적 자각 증상에 시달리는 성중위 개인과의 갈등은 시종 팽팽할 수밖에 없다.
성중위의 후송은 결국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지지만 그를 태우고 후송하는 기차가 어둠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결말에서 성 중위의 회복 불가능을 예상할 수 있다. 후송을 위한 성중위의 이러한 노력을 김주언은 일상적 삶의 건강하게 지탱하기 위해서 삶을 위협하는 삶의 바깥의 타자를 밀어내고자 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다.
<강> 또한 제목이 지닌 상징성이 인물들이 내면으로의 탐색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각각의 주체들인 잠바를 입고 있는 세무서 직원인 이씨, 고깔모자를 쓴 전직 교사 박 씨, 외투를 입는 늦깎이 대학생인 김 씨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흔히 쉽게 볼 수 있는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 인물들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고독한 탐색을 시작한다.
결국 이 세 명의 인물들은 군하리라는 마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동행을 하게 되는데 진눈깨비 내리는 상황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게 된다. 따라서 인물들 각각의 생각들은 서로의 상호 소통이 전제되지 않은 내면으로의 탐색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늦깎이 대학생 김 씨가 보여주는 내면의 탐색은 그가 보는 현실의 의미가 왜곡된 세계라는 것을 드러낸다.
2. 소극적 타자와 우연적 대응
왜곡되고 부정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인물에게 있어서 타자의 인식 자체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타자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 부재하는 야상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적 상처를 탐색하는 인물들은 타자와 진정한 상호소통을 하지 못하며 단선적이고 일회적이며 우연적 대응에 머무르게 된다.
"혼자이요?"
"혼자 있습니다."
"성곽을 가지시오. 그래서 그 성주가 되어보시오."
"결혼 말씀이지요?"
"그렇지요. 월등히 나아질 수가 있어요. 달콤한 육체적 피곤을 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관심을 집중할 테니까."
"그것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중략)......더 복잡해질 것 같아요. 문제만, 왠지 자꾸 최악의 경우가 떠올라서요."
"그게 병이오. 너무 심각해지는 것이 탈이란 말요"주체가 자아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도하는 타자를 통한 자아 찾기는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결혼을 주저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 중위는 아직 그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좀 더 현실적으로 살라고 재촉하는 주의의 질책은 주체에게 있어서는 이 세계와 함께하는 모든 타자들 또한 소극적이다. 또한 성 중위의 정체성 확립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또한 성 중위는 어릴 적 어머니를 대신할 의미 있는 타자를 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결혼을 통한 친밀감의 형성보다는 타자와의 후송을 통한 지연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스토리 전개가 사건보다는 개인의 심리 상태와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되어 실존의 불안과 고독을 부각하고 있다. 성중위의 내면의 일탈 과정을 확대해 보기로 한다.
그는 어렸을 때 살쾡이를 돌로 맞혀 죽인 일이 있었다. 돌을 던진 것은 맞히기 위해서였지만 그의 돌에 날쌘 살쾡이가 맞아서 더구나 죽으리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았었다.
차는 드리쿼터였다. 그것은 속력껏 달려오고 있었다. 성중위는 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차는 속력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운전대 옆에 앉은 중위가 손을 가로 저어 거절했다.
(중략)
그때 성중위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중략)
자동차의 네 바퀴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충격적인 풍경이었다.위의 인용문은 죽음에 관련된 성 중위의 두 가지 체험을 담고 있다. 전자는 어린 시절의 성 중위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살쾡이를 살생했을 때의 경험이고 후자는 성 중위가 지나가는 드리쿼터를 향해 태워달라는 손짓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태우지 않았던 드리쿼터가 전복되어 사고가 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결과는 우연한 성중위의 행동과 생각이 모두 타자의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전자는 우연히 저지른 행위의 결과치고 어린아이 성 중위의 심리적 타격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날쌘, 더구나, 거의'라는 어휘에는 어린아이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성 중위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놀라 이내 어머니에게 달려가 심리적 안정을 찾고자 한다. 어머니에게서 면죄부를 얻어 심리적 고통을 덜어내고 싶은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 성 중위를 꾸짖은 후 포옹해 주자 그는 안심을 하고 죄의식을 덜어 낸다.
그러나 그 이후 어른이 된 성 중위는 우연히 자신을 태워주지 않았던 차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주를 품으면서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폭력적인 성향을 표출한다. 시간의 격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성 중위의 폭력성은 성 중위의 내면의 상처로 굳어지고 그 상처의 징후로써 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조리는 원인의 결과의 고리가 끊긴 상태를 근대의 인간이 연결되었다고 믿는 데에서 발생한다. 이때 성 중위의 무의식적인 저주와 드리쿼터의 사고는 실상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성 중위는 이것을 인과관계의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 중위의 이명 현상은 부조리를 겪는 내면의 외침이자 타자와의 우연적이고 일회적 대응의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3. 의도적 단절과 일시적 유보의 서사
관념적 주체는 일방적이고 단절적인 발화를 통해서 왜곡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적 발화는 단지 의도적이고 왜곡된 세계를 확장시켜 주관적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를 조망하기 위한 일시적인 유보의 서사를 통해서 오염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심한 내적갈등을 보이는 관념적 주체는 이제 주관성을 벗어나 조금씩 세계를 향해 걸어 나오게 된다.
성 중위는 그것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는 소리 없이 외쳤다. 그때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것을 바라지는 더욱 아니하였다.절대절대 바라지는 않았었다...... 다만 내리막에서 저렇게 속력을 내다간 위험하지 않을까, 라고만 생각했었을 뿐이다...... 위험하다고만...... 사실 위험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달리고서 사고가 안날 수 있었겠는가...... 사고가, 사고가 말이다...... 그는 열심히 주장하였다. 주장하고 보니 설복된 듯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허전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허전함이 정통으로 찔리었다.
그는 그와 그 사고 사이에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러나 분명치 않았다. 분명한 것은 다만 귀에 박힌, 소리치는 신음뿐이었다.
"아 아 아 아 - " 죽음이 그를 스쳐갔다...... 스쳐서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를 향해서 쏜 화살이 엉뚱하게도 무고한 사람의 가슴, 가슴 위에......
아 아 아 아 -위의 인용문은 성 중위가 드리쿼터 전복 사고를 목격한 이후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말줄임표는 의식에서 해소되지 않고 들러붙어 있은 고통, 그것에 짓눌려 있는 주체의 신음을 줄임표는 비유기적이고 이질적인 다른 실재들의 역동적이고 불균등한 접합의 표지로써 작용한다. 전자의 인용문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인칭 대명사가 '그'에서 '나'로 바뀌는 부분인데 바로 이 부분은 결국 서술자와 주체의 목소리가 혼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질적 존재의 동시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양가적 공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술자의 주관적 해석만으로 성 중위의 내면의식을 전달하지 않고 성 중위의 말 즉 신음소리, 말줄임표를 통해서 주체는 세계와 타자와의 의도적 단절을 드러내고 있다.
보이는 대로 보는 대신에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었다. 보았던 것을 안 볼 수도 있었고, 안 보았던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풍경화가 더 진실에 가까웠는지 말하기 어려웠다.
(중략)
하나의 풍경에 두 개의 풍경화...... 성 중위는 드문 풍경화를 보고 있었다.인용문에 제시된 하나의 풍경에 두 개의 풍경화가 공존하는 현상은 모순적 현실의 비유이다.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안의 정체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명명하지도 못할 때 발생하는 불편한 긴장이 바로 모순적 현실에 닿아 있다. 군대라는 조직에 의해 획일적으로 압사되어 가는 한 개인과 그 개인의 내면에서 움트는 반격으로 이야기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종결 지점에서 어두운 현실이 다시 비쳐짐으로써 이야기는 또다시 혼돈으로 진입을 암시하는 유보의 서사를 지니게 된다.
실존적 세계의 분열적 주체
서정인의 중기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관념적 내면의 탐색이 현실의 진정성을 획득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조금씩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서정인은 왜곡된 세계를 실존적 세계로 인식하는데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는 전복의 방법보다는 거리두기를 통해서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인물들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부조리함을 느끼며 분열적 주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 인물들은 소극적인 타자의 인식에서 벗어나고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타자는 다분히 파편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타자와의 소통도 불연속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분열적 주체들의 발화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의도가 겹쳐져서 나타나는 압축적이고 집약적인 대화를 사용하게 된다.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자 더 이상 소시민들의 일상과 일탈을 파편적인 단면 아래 담을 수 없게 되었다. 급진적인 산업화와 도시와의 결과로서 부의 불평등, 분배의 문제, 노동 문제 등이 속출하였으며 물질 만능주의와 권위주의가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해졌다.
기존의 현실 인식으로서는 다원화되고 복잡해진 현실을 재구할 수 없다는 서정인의 현실 형상화 의지가 소설의 연작화를 시도하였고, 대화를 전면적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중심의 구축이라는 명분 아래 획일적이고 강도 높은 정책으로 기층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지배 권력층의 권위와 억압을 다원화, 분산화, 탈 정형화의 방식으로 해체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때, 폭압적 시대의 하나의 현상이기도 한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지양하고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적 가치를 인정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연작의 시도와 대화의 전면화는 이러한 연장선 위에 있다. 연작 소설은 독립된 완결 구조를 갖는 일군의 소설들이 일정한 내적 연관을 지니면서 연쇄적으로 묶여 있는 소설 유형을 가리킨다. 연작 소설은 연작을 이루는 각 작품들이 각각의 독립된 제목과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어 그 자체로서도 작품으로서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지니지만, 각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일부 혹은 전부가 중복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서정인은 단편 소설에서의 인물과 배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작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재조명하여 현실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1. 불안한 현실과 소시민적 인물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막연하게 탐색했지만 이제 현실의 모순을 자각한다. 내면으로부터 한 걸음 걸어 나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부조리하며 불안하기만 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주체는 여전히 자의식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스스로를 의식화하는 소시민적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가 지식인의 노동운동으로 점철된 시대였다면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시작된 1980년대는 진정한 민중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 운동이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간 시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1984년 발행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이제 실존적 세계를 인식하는 분열적 주체들로 변화한다.
밑바닥 인생에 속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살아낸 한국의 현대사가 인실의 삶으로 세밀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달궁>>인 까닭에 <<달궁>> 속에는 흙에 쀤 내린 사람의 말을 붙잡기 위한 치열한 작가의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즉 <<달궁>>에 드러나는 인실은 생산성과 침체성을 같이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인실이 윤 선생의 전처소생인 현뫼와 고우내를 친 자식처럼 키우고 윤 선생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 형태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생산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실이 다니던 공장의 사장에 의한 겁탈로 윤 선생의 아이를 유산하는 것이나 형태의 친구에 의해 성폭행을 당해 형태와 헤어지고 형태 소생의 자식들을 고가원에 맡기는 것은 모두 침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인실이 적극적으로 이 모든 침체의 고리들에 맞섰더라면 훨씬 더 적은 침체성을 가진 양면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실 자체가 갖는 현실 인식이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며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서정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까닭이므로 인물의 인식 문제 또한 중요해진다. 인물이 바라보는 현실, 즉 사실은 실재하는데 그 해석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사물의 미, 추는 그것 자체의 미, 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미, 추를 바라보는 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같아요.
일이라고 하는 것이 밖에 볼 때 다르고 안에서 볼 때 다를 수도 있는 뱁이거던. 막상 부딪혀 보면 생판 달라지는 수가 있단 말이여.
색시는 선생님이 수수께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세상이 수수께끼였다. 색시는 선생님이 말장난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세상이 말장난이었다.또한 소시민적 인물은 여전히 불안한 현실을 끝없이 벗어나기 위해 인식론적 해안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인실이가 현실을 계속해서 천착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실은 세계를 지속적으로 부딪치지만 여전히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각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금이 아니더라도 아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을 못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이 있었다. 쩍 벌린 악마의 아가리 속의 번득이는 송곳니들 사이로 머리통을 집어 넣고 있는 것을 보고서 모른 체 할 수 있으랴. 그 책임은 당연히 그들을 알게 해주고 보게 해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것은 쉬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을 보게만 해주면 될 것 아니냐. 그러나 악마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 알려고 하고 안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알게 하고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구제가 어려운 것이 나이라 진실을 보는 것이 어려웠다. 문제는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데에 있었다.
그러나 빼앗긴 것은 분명했을지 모르지만 빼앗아 간 사람(들)은 전혀 분명하지 않았다. 빼앗은 자가 분명치 않은 빼앗김은 빼앗김 같지 않았다.
상전이 없어지면 안정이 가고 혼란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상전을 안 없애 보았기 때문이었소. 상전을 없애고 나면 상전을 없애기 전에는 없었던 힘이 생기요.이처럼 인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습을 삶의 과정을 통해서 인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실에게 세계는 너무도 벅차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실은 현실에 가만히 안주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이 인실의 변화시켜 소시민적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것이 단지 모순을 인지하고 고정된 주체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의 부조리함에 따라서 인실의 모습도 다분히 분열적 주체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2. 파편적 타자와 불연속적 관계
소시민적 인물은 왜곡된 세계를 벗어나 실존적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하나로 타자와의 상호소통을 시작을 하게 된다. 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던 인물이 이제는 거리를 확보하며 타자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시민적 인물에게 여전히 타자는 연속적이지 못한 불연속적 관계로서 파편화된 타자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소시민적 인물에게 타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달궁>>의 인실은 삶의 암초에 부딪칠 때마다 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주로 다른 곳으로의 도피를 일삼는데 이는 인실이라는 여성 자체가 갖는 수동적 성격으로 해석할수도 있지만 소설의 흐름을 인실에서 다른 인물로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한 소설적 장치일 수도 있다.
술취하고 지치고 멍든 그 여자의 초라한 모습은 전날 밤 내가 광어회 작은 접시 하나와 매운탕 백반을 시켰을 때 보았던 생기 넘치고 총명하고 바쁜 횟집 주인여자의 당당한 모습과 겹치면서 하나의 완전한 여자의 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
(중략)
그 여자의 차 속 얼굴은 바로 어둠 자체였고 그림자가 드리울 틈이 없었어. 밝은 그 여자의 식당 얼굴에 낀 검은 구름의 한 조각은 전날 밤 식당에서 보았음이 분명해. 밝은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면 어두운 얼굴에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 아닌가.
유면한 조사들은 대개 개인보다도 집단에 의해서 구체적인 얘기보다는 두루뭉실한 얘기를 하고 있소.위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실이 이제는 애인의 구체적인 얘기보다는 다양한 삶을 아우르는 두루뭉술슬한 얘기로 양면적이고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게 된다. 즉 타자와의 소통은 연속선상의 유기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한다는 것은 서정인 후기 소설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가 이제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며 그들의 삶을 들여 이해가 가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인실과 만나는 타자들은 너무도 다양하며 그들 모두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작 소설인 <<달궁>>의 방대한 타자를 모두 다루지는 못하며 작품 속의 한 인물과의 진정성의 깊이를 나타내자면 각각이 수치상의 편차가 많을 수도 있겠지만 인실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부유하고 있는 타자와의 만남 자체가 이미 소통의 마음가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달궁 둘>>은 인실이가 이제 또 다른 현실 속에서 다양한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윤 선생의 집을 나온 인실은 황 노인의 손녀딸이 은숙이의 도움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은숙은 서울 외각에서 공장을 다니는 전형적인 도시 빈곤층의 노동자를 대변하게 된다. 은숙의 도움으로 인실도 다시 마음가짐을 하고 공장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된다. 공장에 취직을 한 인실이는 도시생활과 공장의 여공들인 여러 친구들을 만나면서 도시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인실은 늘 그래왔듯이 열심히 일을 했고 생각지도 않았던 재봉부의 조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공장의 하 상무는 인실이가 회사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고 인실이는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제는 내 마음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던 중 철야 작업이 길어지고 친구들의 원성과 불만은 커져가기만 한다. 하 상무와의 예기치 않은 겁탈은 또 인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하 상무는 항상 그래왔듯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 모습 속에서 인실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조리함을 이제 말하기 시작한다. 그 옆에는 진순이가 있었고 또 공장 여공들의 작업 환경에 눈을 뜨며 아래로 있는 것을 불합리하다는 판단을 한다.
인실은 분열적 주체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세계 속의 소시민적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주체에게 타자는 파편적으로 부유하는 불연속적 관계들로 형상화된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즉 실존의 세계에서 주체는 자신의 모습을 해체적으로 자각함으로써 타자 또한 주체에게 아직은 실존 자체가 미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관념적 주체가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몰두하다가 이제는 부조리한 세계를 인지하고 타자의 존재 자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은 매우 발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는 서정인 후기 작품에 등장하는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의 밑거름을 제공해주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3. 집약적 대화와 연쇄적 수용의 서사
파편적 타자와의 불연속적 관계는 세계와 화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결국 분열적 주체는 자신의 현실과 타자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집약적 대화를 사용한다. 더 많이 타자를 끌어안고 싶었던 주체는 자신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구어와 요설의 연쇄적 수용의 서사 구조를 통해서 실존적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달궁 셋>>에서는 인실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해서 타자들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그들의 대화는 집약적이고 압축적이다. 인실은 홍형태와의 생활을 뒤로하게 된다. 홍형태에게 과거는 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래서 인실은 형태의 곁은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한편 다시 인실에게 현실을 김 사장의 도움으로 가게를 열고 술장사를 하게 된다. 장사를 하면서 인실은 타자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는 없다. 주체인 인실의 존재 자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는 현 존재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실의 타자들과의 소통의 규모는 양적으로 방대하기 때문에 양적 방대함을 소설에서 표현하기 위해서 집약적 대화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 참고 문헌
서정인 소설의 주체 연구 / 최주희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 2009
서정인 소설 연구 / 차성연 / 경희대 대학원 / 2001
서정인 초기 단편 소설 연구 / 박지연 / 서강대학교 대학원 / 2004
서정인 소설 연구 - 서술 특성 중심으로 / 곽경현 / 한림대 / 2006
서정인 소설 연구 / 윤혜경 / 연세대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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