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7. 23.

    by. 건물주님이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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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영수 70년대 문학 특징과 주요 작품

     

    70년대 - 문명비판으로서의 자연회귀와 전통세계

      분단과 전쟁이 야기한 인간 삶의 피폐한 국면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은 70년대 이후 현대 도시문명의 비정성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분노와 고발로 이어지고 있다.

      70년대에 오영수의 작품에서는 문명화, 기계화, 편리본위의 생활로 변화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점차로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작품의 주인공들이 현대 생활의 불안정이나 사회현상의 모순과 불합리 등에서 오는 정신적인 불만 등으로 인해 결국에는 귀향을 하거나 자연으로 돌아가 건강한 삶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갯마을>에서 남자를 쫓아 마을을 떠났던 여인이 끝내 '갯냄새' 풍기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 애정 등의 문제를 넘어서서 '갯마을'로 상징되는 그 무대는 원초적이고 소박한 고향에 대한 귀소적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1950년대에 <갯마을> 같은 작품이 돌출적으로 나오는 것은 바로 작가가 전쟁 및 현실의 상처로 도속적이고 전원적인 곳으로 회귀하고 싶은 염원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은냇골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생존할 수 있는 고향의 모습을 좀 더 구체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곳은 바깥세상에서는 의젓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온정과 선의의 세계이며 화해와 용서의 세계인 것이다. 이는 '갯마을'이라는 장소가 산골로 변형된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은냇골'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사정이 있어서 이곳으로 피해 온 사람들이다. '김가'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조카딸 덕이와 눈이 맞아 은냇골로 돌아왔고, '박가'는 노름하는 형을 해치고 포리에게 쫓기다 못해 그곳으로 들어왔다. 문둥이 부부 또한 바깥세상에서 남들과 버젓이 어울려 살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문명의 손길이 조금도 미치지 않은 철저히 폐쇄된 사회인 '은냇골'에서 원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극심한 가뭄으로 정신이상이 된 김가의 아내 덕이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솥에 넣고 불을 때며, 식량을 구하러 대처에 나갔다 돌아온 김가에게 "묵을 거 없다"라고 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식량을 이웃과 공유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은 가뭄이 들기 전 이 골짜기의 가장 연장자인 양노인이 이들 김가와 박가 두 장정에게 대이음에 대해 일러주는 부분이다.

     

      "이 은냇골엔 무슨 까닭인지 두 대만에는 거의 절손이 되어버린단말요."
      "으음 그렇지! 우리가 먹고 사는게 곡식인데 이 곡식을 얻기 위해서 씨를 끔찍이 간수하거든, 아무리 좋은 밭은 가져도 씨가 없으면 묵발이 된단말요. 내 말 알아듣겠소?"
      "또 밭이 좋아도 씨가 충실치 않으면 곡식이 영글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 집 씨가 충실치 않을 때는 남의 집 씨를 빌려다 쓴단 말요."

     

      이들은 전통적인 남녀관계, 전통적인 윤리와도 거리가 있는 삶을 산다. 같은 여자를 두 남자가 소유하기도 하고 자손을 얻기 위해 며느리에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도록 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대를 잇기 위하여 생산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부인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어 잉태를 시킨다는 것은 풍속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륜이다 도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웃에게 후손을 잇게 해 준 선을 베푸는 행위로써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현재의 윤리의식 속에서는 납득하지 못할 이러한 문제점을 제시함으로써 산업화로 인해 희미해져 가는 윤리의식과 성이 건전한 생명에의 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 세태를 비판함과 동시에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생명보존과 종족보존의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공생의 원리를 강조하며 '우리'라는 동류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오영수는 <은냇골 이야기>에서 세속에 때묻지 않은 원시공동사회를 건설하고 있으며 깊은 산골을 배경으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 역시 오염되지 않은 건강하고 원시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냇골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는 깊은 산골은 공동체적 유대감이 지속되고 있는 곳으로 건강하고 원시적인 인간들이 모여사는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뿌리를 제대로 내리기 힘든 산업사회의 공간이 아닌 근대화되기 이전의 순수 소박한 상태 즉 문명의 손길이 닿기 이전의 공간을 설정함에 따라 피폐된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구체적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러한 공간의 설정은 오염된 인간의 본성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의 모색을 문학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시도해 본 것이기 때문이다.

      오영수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 또 다른 작품인 <망향수>는 소외된 노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할머니는 원래 시골에서 살았는데 모기업체의 사장인 큰아들집에서 도시생활을 시작하면서 최고조로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의식주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가난하고 구차했던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충족한 생활을 하나, 마음이 항상 불편하고 즐겁지가 않다. 얼굴 보기 힘든 아들과 대화 없이 지내는 며느리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늘 시골을 잊지 못한다. 이는 시대의 변화로 인해 사회 전반의 가치관에 혼란이 오고, 유교적 관습까지 파괴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들로부터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항상 외롭게 지내야 하는 소외된 인간의 모습은 산업사회가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간적 조건을 파괴시키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영수는 결국 이러한 도시의 메마른 삶을 버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아직은 남아 있는 시골로 내려오는데 <오지에서 온 편지>에서 도시의 삶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온 모습을 볼 수 있다. <오지에서 온 편지>는 문화적 최점단권인 서울에서 원시에 가까운 비문학적 자연환경인 '오지'로 내려오게 된 구체적인 이유와 오지에서 2년 남짓 살아온 심정을 친구에게 편지형식을 빌어 술회하고 있는 내용이다. 전작품이 5통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가 오지의 주인공 '나'가 1인칭 서술자로 되어 있는데 작가 자신의 생애와 관련되어 볼 때 작가 자신의 낙향생활을 작품화한 것으로 보인다. 

      오영수는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대기오염, 공업단지 부근의 과수원과 농작물의 고사 등 물질적인 피해는 물론이고 부정 식품과 부정 의약품의 횡행, 법이 준수되지 않고 양심과 성실이 무능력으로 조롱받고, 노력의 대가대로 보수가 돌아가지 않는 불신, 불공평과 가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비리의 사회에 대해 통렬한 매질을 가함으로써 물질문명에 의하여 황폐된 인간의 정신까지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테두리 안에서, 그 굴레에 얽매여 살고 있는 인간적인 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성마저 상실되어 감을 지적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능률과 편리 본위의 기계적 문화생활이 음식 맛까지 규격화시켜 인간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을 그 밑바닥부터 파괴하고 있는 현대문명을 '도시는 지옥이요, 시궁창은 감방'이라고 혐오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편리 본위의 현대문명사회로부터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개탄하면서 인간 회복과 생존을 위한 새로운 가치 창조의 방향을 제시하고 모색해야 할 것을 경고해 줌과 동시에 인간이 물질문명의 피해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오영수는 물질문명의 도시생활을 비판하고 따뜻한 인정이 느껴지는 순수한 자연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서 오영수는 도시보다는 시골을,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오늘보다는 어제를, 새로운 것보다는 낡은 것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도시의 현실을 버리고 두메산골을 찾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의 탁류에 오염되지 않는 건강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의 강렬한 향수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리고 소명되어 가는 낡은 것에 애써 눈을 돌리는 것도 단순한 퇴영적 회고가 아니라 외래풍조에 오염되어 가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소중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 문헌
    한은희 / 오영수 소설 연구 /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 1997
    서광숙 / 오영수 소설 연구 / 영남대학교 / 2002
    김지영 / 오영수 소설 연구 / 강릉대학교 교육대학원 / 1998
    송준호 / 오영수의 갯마을 연구 / 한국언어문학 / 2002
    권영민 / 한국현대문학사 2 / 민음사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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