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7. 21.

    by. 건물주님이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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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진의 문학

     

     

    김소진의 문학 - 아름답고 따뜻한 과거와 기록정신

      김소진의 문학은 그의 문학의 원천으로서의 아버지의 존재와 70년 대적 현실 속에서 생활인으로 살아온 어머니의 삶.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쥐 잡기>에서의 아들 민홍으로 나타나는 90년대의 현실과 맞서는 지식인의 현실대응이라는 큰 두 가지 줄기로 구성된다. 특히 아버지의 존재와 삶은 김소진 문학의 근원을 이룬다. 등단작인 <쥐 잡기>를 비롯하여 <사랑니 앓기>, <개흘레꾼> 등 아버지의 존재가 소설 구성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로부터 <적리>, <춘하, 돌아오다> 등 작품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존재와 삶은 아들 '민홍'의 삶을 규정하는 요소이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의식에 눈뜨게 하고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일종의 소설적 장치에 그치지 않는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적 공동체이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경제적 무능력자로 어린 아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인생의 실패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초라한 아버지가 가슴속에 안고 있는 역사적 비극의 상처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부정과 경멸의 대상으로서만 남지 않고 연민과 동정으로 감싸야할 민중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러한 아버지에게서 느끼는 심정은 절망이다. 넘어서야 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아버지가 사실은 민족적 비극의 상처를 침묵으로 견디며 살아가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들 '민홍'의 가슴에 남는 것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희생된 아버지에 대한 동정처럼 80년대의 이념을 좇다가 초라해진 자신의 삶에 대한 절망감뿐이다. 이제 극복대상은 아버지의 존재에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현실로 대체된다. 혁명에의 꿈은 잃어버리면서 현실에 의해 상처 입은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의 시선과 연민을 이제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는 것(<두 장의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은 당연하다.

      비극적인 아버지의 운명과 자신의 삶의 모습을 쥐잡기라는 상징으로 표현한 <쥐 잡기>는 '민홍'의 가족사를 다룬 작가의 내면기록이지만 바로 쥐 잡기로 상징되는, 8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청년지식인의 90년 대적 현실에 대한 맞서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 김소진 문학을 통해 읽어내야 할 것은 아버지의 현실인 70년 대적 현실을 원체험으로 성장한 아들 '민홍'이 90년대의 위기적 현실에 어떻게 맞서 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이후 김소진의 소설에서 전개되는 현실은 철저히 기자의 눈으로 기록된다. 기자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수습일기>,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춘하, 돌아오다>, <임존성 가는 길> 은 모두가 기록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열린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밥풀때기'로 표현되는 부랑자들을 동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던 작가는 마지막 부분을, 과연 누가 열린 사회의 적들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채로 남겨두면서 한 사람의 실족사를 '두 줄의 기사'로 끝맺는다. 문제적인 현실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그 현실에 뛰어들지 않는 철저한 관찰자의 태도에 선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민중의 자리를 작가가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닌 기록정신이다. 이는 <쥐 잡기>에서 현실과의 대응에 실패했던 아들 '민홍'이 현실로부터 한 발 물러서 현실을 관망하는 형국인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관망의 자세는 현실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거나 현실의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는 데에 기인한다. 이후 그의 작품이 대체로 일종의 '소극'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처용단장>, <지하생활자들>, <혁명기념일>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늪이 있는 마을>의 마지막에서의 반전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정치꾼이었던 아버지에 대항해 '혁명'의 대열에 섰다가 이제는 아버지의 현실에 투항하여 직업외교관으로 체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석주'와, 전기통신공사에 근무하면서 발을 땅에 딛지 않고 전신주에 올라 허공에서 사는 이전에 무정부주의자였던 '진기' 두 사람의 명징한 대비를 통해 지난 시절의 열정을 접고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혁명기념일>은 "진기 형 당신은 비극입니까 소극입니까"로 시작하며,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가 술에 취해 구토하면서 "베토벤의 5번 교향곡보다 더 운명적인 소극"이라는 말을 내뱉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으이구, 요 귀여운 룸펜! 정이 넘치다 못해 입덧까지 대신해 주니 고맙기도 하겠구려"라는 아내의 말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 만들어 버린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러한 태도는 허무주의로 귀결되기도 한다. 사시합격자 서영태와 술맛을 감정하는 직업을 가진 아내 라은미, 영태의 친구인 국문과 박사과정에 있으며 희곡을 쓰는 권희조, 아내와 친구의 불륜이 상징되고,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권희조의 창작 속의 새로운 처용해석이 놓여 있는 <처용단장>이 그 예이다. 친구 희조는 떠나가고 이제 선택은 영태에게 남는다. 그는 풍자와 해탈의 기로에 서 있다. 

      1970년대 가난이 보편적 삶의 모습으로 유지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 <장석조네 사람들>에 오면 현실에서의 후퇴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삶의 근원이라고 믿는 인간에 대한 신뢰, 더불어 사는 지혜에 대한 그 시절 사람들의 자연적인 합의와 묵계, 인간적 도리에 대한 순박한 복종심 등이다. 오늘의 삶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으로 인해, 더 이상 오늘의 현실을 다루지 못하고 작가의 원체험의 세계였던 70년대의 세계로 후퇴한 것이다. 연작소설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시간적, 공간적 통일성은 물론 주제의 통일성마저 확인하기 어렵다. 사소한 일상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추억만 작품의 전편에 드러날 뿐 사회적 대결은 아름다운 마음씨에 의해 싱겁게 끝나고 만다. 길음동 산동네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감싸 아는 것으로 그쳐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작가에게 있어 모든 것의 출발이 되는 원체험으로서의 공간인 70년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자기 정리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 아버지의 현실에서 나의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소진의 소설 언어 - 김소진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균형감각'

      함경도 출신의 아버지와 철원 출신의 어머니를 가진 탓에, 또 그들과 함께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미아리 산동네 장석조네 사람들, 그 다양한 지방에서 몰려든 교육적 소양이 결여된 사람들 속에서 성장한 탓에, 마지막으로 그의 수학과정이 보여주듯 세련화된 지식계층에 편입되었던 탓에 그는 아마도 매우 일찍부터 다양한 지역과 계층의 독특한 언어적 차이들에 눈뜰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소설 특유의 다중언어성에 근접할 수 있는 여러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의 소설들은 '나'로 대표되는 지식인층의 의식세계와 어머니 철원네나 장석조네 사라들로 대변되는 기층민중의 의식 세계 사이에 놓인 차이와 갈등을 풍요롭게 드러내주는 세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채로운 언어 세계가 단지 생득적인 혜택의 소산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첫 소설집이 보여주듯 초기의 그의 언어는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그만큼 읽기에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언어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습득되어온 것임을 의미한다. 두 번째 소설집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언어는 방언과 표준어, 속담적 표현과 개성적 표현 등이 충돌을 일으킨 나머지 문장들이 돌의 거친 표면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들 표현들이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어우러지게 된 것은 성장의 기억을 전면적으로 더듬었던 연작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에 이르러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소설 언어는 더디게 다듬어져 왔던 것이다.

      한편 그의 언어는 우리의 소설적 전통을 의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민중언어 혹은 구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1970년대 이래 우리 소설의 한 전통을 이루고 있다. 박경리, 이문구나 송기숙, 현기영, 조정래라든지 그 밖의 몇몇 작가들에 의해 이어져온 이 같은 전통은 1980년대 소설의 한계의 하나로서 우리 소설적 전통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꼽기에 이른 1990년대에 와서 한창훈이나 전성태, 김형수 등의 신진 작가들의 작업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김소진의 소설들은 그러한 노력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매우 두드러진 성과물이라는 점에 큰 가치가 있다. 

     

     

     

    ※ 참고 자료

    김종욱 / <또 다시 아버지를 찾아서> / <<문예중앙>> / 1995년 겨울호

    임규찬 / <90년대 리얼리즘 소설의 몇몇 풍경> / <<문예중앙>> / 1995년 겨울호

    김경수 / <현대적 삶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 / <<실천문학>> / 199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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