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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상의 주요 작품인 <날개>의 줄거리와 핵심정리에 이어 보충 해설에 대해서 정리해 봅니다.
여전히 문제인 문제작
한국문학사에서 <날개>만큼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또 계속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고,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면서 탐구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문제를 내포한 채 우리 앞에 다가오는 작품이다. 이상의 작품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 또한 실험 정신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이전의 소설이 보여 주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펼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의식의 문제를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심리주의적 바탕에서 쓰여졌고, 표현에 있어서도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을 따르고 있다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이다. 이 작품에 대한 견해 중, 일제의 지식인의 고뇌를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목적의식을 상실한 지식인의 표본이 '나'이고 나의 삶을 제한하며 간간이 돈을 던져 주는 아내가 일제의 상징이며, 그 아내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아픔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몸짓이 마지막 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시각이다. 시대와 문학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문학은 결국 시대 상황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이런 의견은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작품의 외적 상황이 그대로 작품 세계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일단 작품의 내적 세계에 국한하여 이 작품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믿는다.
<날개>의 서사구조 : 외출패턴
<날개>의 서사구조는 대체로 다섯 번의 외출이 반복되는 '외출패턴'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이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로 표현된 자폐적 성격의 소유자요, '두 개의 태양'으로 상징되는 이중성격 내지 자아부녈의 징후를 보이는 비일상성의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한 인물이 다섯 번의 외출을 통해 어떠한 방향으로 변모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본 패턴의 의미를 추출해 내는 작업이요, 나아가 <날개>의 주제를 명징하게 밝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외출이 다섯 번 반복되는 동안에 점차 생기는 변화는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고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비밀스럽던 아내의 사생활이 드러나게 된다. 아내는 뭇 남성에게 정조를 팔고 돈을버는 매음부였으며 매음행위를 간섭하고 방해하는 남편을 수면제로 잠재우는 일도 불사하는 부정적인 존재임이 드러난다. 둘째, 나와 아내와의 관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곧 여지껏 남편이 아내에 의해 사육당하는 비정상적 부부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어 가고 있다. 셋째, 외출행위 자체도 주인공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차츰 자의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다. 넷째, 세상과 절연된 생활의 리듬이 깨지고 외부 세계와의 교섭의 폭이 점차 넓어진다. 비록 비정상적인 일상생활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그 '볕 안 드는 방'에서의 폐쇄적 생활에 안주하여 빈둥거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외출을 통해 이 폐쇄된 생활과 의식에서의 탈출이 모색되는 계기를 갖는다. 다섯째, 그리하여 폐쇄적이고 어두운 공간과 시간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주인공은 어두운 작은 방이란 제한된 공간 속에서 차츰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게 된다. 볕 안 드는 방으로부터 거리로 다시 경성역 대합실로, 산으로, 옥상으로의 공간이동은 공간의 확대의 경향마저 보여준다.
외출의 시간 역시 어두운 밤에서 낮으로 또는 자정에서 정오로 이동한다. 특히 밤에서 낮으로의 이동은 주인공이 산에서 수면제 여섯 알을 먹고 일주야를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사건과 더불어 죽음의 체험에서 재생으로 옮아오는 신화비평적 의미를 내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주인공은 어머니의 자궁속 같이 폐쇄된 방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퇴행적 생활과 의식에 고착된 상태로부터 탈출하게 되고 전도된 질서로부터 해방을 얻게 된다. 일상적이고 비본질적인 자아에 눌려 마비되었던 본질적 자아를 자각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자를 물리치고 후자를 되찾는 의지적인 인간 회복에의 과정이 또한 외출패턴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 외출패턴이 지향하는 바, 비본래적 자아로부터 본래적 자아로의 회복, 분열된 자아의 통일 및 퇴행적인 자폐적 생활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극적인 표출은 <날개>의 마지막 절규에서 완결된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한 번만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그런데 이 절규에는 "미래로의 투기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다분히 감상적인 향수"가 담겨있다. 날개는 과거의 것이며 무능력한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은 과거의 날개로 '한 번만 더' 날자고 하는 재기에의 뜻을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희망과 양심으로 조형된 과거에의 회귀'란 의미를 내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작품의 주제도 여기에 두어 무방할 것이다.
닫힌 공간, 열린 공간
이 작품에서 문제삼고 있는 자의식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간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설정되어 있는 공간은 크게 '방'과 '거리'이다. 작중 화자가 거처하고 있는 방은 장지문에 의해 차단된 방이다. 본래는 하나의 방이지만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는 화자의 방이요, 다른 하나는 아내의 방이다. 방이 나뉘어 있다는 것은, 아내와 화자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와 화자는 동떨어진 위상을 가진 존재가 된다. 아내와 화자는 이런 면에서 대조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의식은 갈등한다. 화자는 자기 방에서 칩거한다. 반면 아내는 외출을 하거나 내객을 맞는다. 화자가 폐쇄된 공간에 처하고 있다면, 아내는 열린 공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에게는 사람들과의 교섭이라는 생활이 있게 되지만, 화자는 완전히 차단된 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혼자 있는 화자가 만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자아가 자아를 만나면 대화를 나누는 일, 그것이 자의식이다. 자의식이란 자아가 또 다른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자는 이불속에 파묻혀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날을 보낸다. 화자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상과 일치하지 못하는 자시느이 위상이다. 세상으로 대표되는 아내와도 그는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화자와 아내는 원래 가장 가까운 사회적 관계에 있다. 그 아내와 합치될 수 없는 화자의 위상은 곧바로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단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가 문제가 된다. 화자가 아내에게서 단절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내와 한 방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내는 내객을 맞아 몸을 파는 창녀이다. 내객과 아내는 육체적 관계를 맺지만 화자는 그러지 못하는 것에서 연유하는 단절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내는 육체에 살고, 화자는 끊임없이 무엇을 궁리하며, 세상살이에 재미를 못 느끼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둘은 매우 대조적이고 이점에서 갈등과 단절이 온다. 그런데 화자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아내에게 부속된 존재이지 그와 아내가 대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성적인 관계의 불균형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아내와의 실제적 접촉은 꾀하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만 성적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나는 그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구녕을 내 코에 갖어다 대이고 숨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이국적인 센슈알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저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내음새가 났던가를...... 화자의 콤플렉스는 바로 이 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적 능력의 결핍에서 오는 열등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화자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그는 아내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또한 나중에 아내의 방에서 자고 난 뒤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방이 어둡고, 아내 방에는 햇볕이 드는 것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그 점은 분명해진다. 햇볕의 밝음은 성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화자는 어두운 방처럼 그 문제에 있어서 어두운 우울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화자의 방과 아내 방의 공간적 괴리만큼, 집과 거리의 관계도 상징적이다. 화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집안에 고립되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집과는 대조된 공간이다. 그곳은 번잡함과 뭇 관계가 있으며, 활기가 있는 삶의 현장이다. 화자는 그곳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다. 이 소외는 폐쇄된 자아로 하여금 더욱 왜소하게 만든다. 화자가 거리에 나가지 못하는 한 그는 영원히 고립된 세계에 빠져 자아는 극단의 분열을 보이고 마침내 파탄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외출을 감행하고 드디어 더 넓은 세계에로 나아간다. 따라서 거리는 열린 세계이며, 외출은 자아의 칩거에서 자아의 자유로 향하는 행동의 표출이다.
성에 대한 천재의 보고서
이 소설이 인간의 내면 의식 탐구라고 했는데, 그 의도는 프롤로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프롤로그에서의 화자와 이야기 속의 화자는 그 위상이 다르다. 그것은 어조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프롤로그의 어조는 상당히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속 이야기의 어조는 그와는 상당한 차이가 나 어수룩한 어투를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것은 프롤로그의 화자이며, 속 이야기의 화자와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속이야기를 펼치게 된 동기를 프롤로그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은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중략) 그 위에다 위트와 패러독스를 늘어놓소."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하나의 패러독스를 즐겨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일 중 하나가 여인을 그려보는 일인데, 여인의 반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해 놓고 낄낄거려 보려고 한다. 이따금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조해 보는 즐거움을 얻으려 한다. 19세기를 청산한다는 것의 의미는 정신의 가치를 떨쳐 버리자는 것과 동일한 시각의 표현이다. 여자를 보는 안목을 '여왕벌'의 그것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왕벌은 수벌과 교미한 뒤 모조리 죽여 버리는 벌이다. 그런 면에서 미망인이다. 화자는 여자를 전부 미망인이라고 본다. 여자에게 남성은 수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여자의 본질은 고매한 정신에 있다기보다 육체적 애욕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반을 영수하다는 앞에서의 말은, 여자의 성만을 취해 그 생활을 탐구하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핵심이 이문제의 구체화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있어서 이 작품을 너무 턱없이 고평한 것은, 성적 문제에 국한한 이상의 의도를 너무 확대하여 해석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핵심은 성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박제는 외형은 그대로지만 생명이 없는 사물이다. 화자는 자신을 박제로 규정한다. 즉 박제인 천재이다. 생명력을 상실한 지식인을 지칭하는 의미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애욕을 상실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한다. 도덕이나 양심과 같은 지성적 가치 판단과 성과 욕망 따위의 생활감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분리되어 있어서 하나의 자아가 또 다른 자아와 거리를 두게 될 때 자아의 갈등은 심각해진다. 사실 이러한 의식의 분열상은 지성인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성인, 즉 천재이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분열되고 갈등에 젖는 것이다. 아내는 정신이 빠져나간 육체만 있는 존재이다. 나는 아내와 일치하지 못한다. 아내와의 일치를 꿈꾸는 행위는 곧 두 개의 자아의 통합을 꾀한다는 의미이다.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자아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 자아의 탈출이 외출 행위로 표상되고 있다. 그의 외출을 살펴보면 조금씩 그 거리가 멀어진다. 첫 번째 외출은 얼마 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빨리 돌아온다. 그다음은 시간과 공간이 조금 확대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 궁극에는 완전한 일탈을 꿈꾸게 된다. 이 일련의 외출을 통해 폐쇄된 자아에서 열린 자아에로 통합되어 가는 것이다. 그의 겨드랑이가 가려워지며 날개가 돋으려 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세계로의 전이를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그 가능성이 내재했던 것이다.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에서 날개가 생성된다고 하여, 그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날개를 펼치려고 한다. 자아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자유에의 발견인 셈이다. 그것을 그동안 억눌러 왔던 것이다. 이 억누르는 자아의 자의식이 너무 강렬해 억눌려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억눌린 자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내에게 의기소침한 자아이다. 이제 그 자아를 벗어나 욕망과 순결이 조화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문제성은 이런 주제 의식에서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고, 의식의 흐름을 좇아 의식 세계의 내부를 해부하는 데에도 있다. 명멸하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화자의 생각은 간단없이 자유롭게 연상이 전개된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이처럼 자유 연상에 의해 의식은 흘러간다. 이상이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은 이렇게 내면 의식이 흘러가는 그 진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상의 <날개>는 초현실주의라는 바탕에서 인간의 의식의 본질을 치밀히 분석하여 그것의 진상을 드러내려고 한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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